전쟁은 삶을 한순간에 바꿔놓았다. 부모 사랑 듬뿍 받던 아이가 고아가 되었고 농사를 천직이라 여기던 농부는 좌판 상인이 되었다. 피부색이 검고, 흰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. 남한 정부의 임시수도, 부산.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 밀려드는 피난민들로, 47만이던 부산인구가 순식간에 100만으로 늘어났다. 당시엔 갖춰진 집을 가진 사람보다 시레이션 상자로 만든 임시 집을 가진 사람이 더 많았다. 집이 없는 설움보다 더 큰 고통은 배고픔이었다. 종교단체에서 식량을 배급할 때면 으레 아귀다툼이 일어났다. 내가 먼저 살고 볼 일이었다. 굶는 날이 많아지자, 미군부대 음식쓰레기로 끓인 꿀꿀이죽도 먹을 만 했다. 사람들은 점차 피난살이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. 언제부턴가 부산에선 미국냄새가 났다. 미군의 구호물자가 부산항에 들어오면서 미국의 문화도 함께 상륙했다. 모국어도 제대로 익히지 못 한 아이들이 “기부 미 초콜릿, 기부 미 껌- ” 이라는 낯선 언어를 먼저 배웠다. 미군과 한국 여자가 결혼하면서, 한국 여인에게서 피부색이 검고 흰 아이들이 태어났다. 낯선 문화가 익숙한 문화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. 폐허로 변한 평양. 유엔군의 폭격으로 북한 땅엔 아무 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. 건물도,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.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. 밤낮 없는 공습으로 사람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. 공장과 시장이 땅 밑에 들어섰고,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활동이 어두운 지하에서 이뤄졌다. 전쟁 지원활동은 전선에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 아이들과 여자들의 몫이었다. 그때, 북한 주민들에게 가장 두려운 건, 유엔군 폭격기가 다가오는 소리였다.